지난 4월 18일 코엑스에선 서울대, 카이스트, 성균관대, 영국 케임브리지대, 미국 터프츠대 등 4개국 7개 기관에서 총 16개 팀이 참여한 가운데 소프트 로봇 경진대회인 ‘로보소프트 2019 컴피티션’이 열렸습니다.
소프트 로봇 분야 국제 학술대회인 ‘로보소프트(RoboSoft) 2019’의 부대 행사로 열린 이 대회에서 참가 팀들은 각각 장애물 지형 통과 챌린지(Terrestrial Race Challenge), 매니풀레이션 챌린지(Manipulation Challenge), 웨어러블 챌린지(Wearable Challenge) 등 종목에 도전해 열띤 경쟁을 펼쳤습니다.
참가팀들은 챌린지 과제를 수행하면서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딱딱한(Gigid) 재질의 로봇과는 다른 소프트 로봇 특유의 유연함으로 난관을 헤쳐나갔습니다.
장애물 통과 종목에 도전한 로봇들은 로봇 본체의 형태에 변화를 주면서 모래밭이나 좁은 통로 등 장애물 구간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줬고 매니풀레이션 종목에 도전한 로봇들은 로봇 팔 끝부분에 설치한 소프트 그리퍼를 활용해 생고기, 파인애플, 포도송이, 나사 등 모양이 제각각인 물체들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다른 통으로 옮기는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l 공기 튜브 모양의 소프트 로봇이 모래밭 등 장애물 통과 과제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 필자)
이번 ‘로보소프트2019 컴피티션’과 ‘로보소프트 2019’에 소개된 소프트 로봇 기술은 미래 로봇 기술의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줬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행사로 기억될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소프트 로봇은 로봇 산업계에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아직은 전통적인 의미의 로봇 기술보다 조잡해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로봇 과학자들은 소프트 로봇이 미래 로봇 기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로봇 선진국과 후발국 간에 기술적인 격차가 아직은 전통적인 로봇 분야에 비해 크지 않기 때문에 초기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로봇 과학자 간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l 로봇 팔 끝에 부착된 소프트 그리퍼를 이용해 생고기, 파인애플, 포도송이, 나사 등
다양한 형태의 물체를 집어 옮기고 있는 모습 (사진: 필자)
스탠퍼드대에서 수술용 로봇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지아다 게르보니(Giada Gerboni)' 박사후 연구원은 지난해 TED 강연에서 소프트 로봇이 향후 의료, 재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쓰임새가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는 관절과 액추에이터로 이뤄진 전통적인 의미의 산업용 로봇들이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 제어되지만, 프로그램에 아주 작은 오류가 생겨도 로봇이 오작동하거나 사람 또는 로봇 스스로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 딱딱한 금속성 로봇들은 산업 현장에서 일상생활 현장으로 들어가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고 있는 일상적인 환경은 공장이라는 통제된 환경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로봇들은 불확실성이 높은 일상적인 환경에선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반면 소프트 로봇은 아직 기술적으로 초기 단계에 있지만, 불확실성이 크고 비구조화된 비정형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다만 기술적인 발전 속도가 더딘 편이어서 상용화 사례가 별로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지아다 게르보니’는 소프트 로봇이 ‘체화된 지능(Embodied Intelligence)’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 환경에 맞게 자신의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속해 있는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사람 몸 안에 들어가 부드러운 장기에 손상을 주지 않고 상처 부위를 관철하고 치료할 수 있는 유연한 내시경, 수술용 바늘, 수술용 로봇 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인체 장기를 통과해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려면, 그리고 주요 장기에 손상을 주지 않고 인체 내부에서 유연하게 활동하려면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지고, 유연한 동작이 가능한 소프트 로봇 기술이 필요합니다.
인간과 동일한 작업 공간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협동 로봇, 노인들과 정신적•물리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간병 로봇, 인체를 대상으로 최소 침습 수술을 시행해야 하는 의료용 로봇, 재난 현장에서 인명 구조 활동을 펼쳐야 하는 재난구조용 로봇, 지구와는 판이한 환경인 우주 공간에서 활동하는 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프트 로봇 기술이 필요합니다.
주변 환경에 순응하면서 인간과 로봇 자신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소프트 로봇은 인간과 로봇이 공존해야 하는 미래 세상에선 꼭 필요한 기술입니다.
l 체칠리아 라스키 교수가 개발한 문어 로봇 (출처: 이탈리아 산타나 대학 바이오로봇연구소)
소프트 로봇 분야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이탈리아 산타나 대학(Scuola Superiore Sant'Anna) ‘바이오 로보틱스 연구소’의 체칠리아 라스키(Cecilia Laschi) 교수입니다. 그녀는 ‘문어 로봇(Octo-bot)’을 개발하면서 비주류였던 소프트 로봇 분야를 로봇 연구의 주류로 끌어올렸습니다. 지난 4월 열린 ‘로보소프트 2019’에도 키노트 연설자로 참석해 소프트 로봇의 현황과 미래에 관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체칠리아 라스키 교수가 개발한 문어 로봇은 8개의 다리를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좁은 통로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문어의 운동 메커니즘은 앞에서 언급한 ‘체화된 지능’이란 개념에 잘 부합합니다.
문어는 중앙에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각 부분이 주변 환경에 맞춰 스스로 적응하는 일종의 분산 제어 메커니즘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상당수 동물이 진화 과정에서 이 같은 원리를 자연스럽게 체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체칠리아 라스키 교수는 문어의 이 같은 능력에 주목해 소프트 로봇인 문어 로봇을 개발했습니다.
소프트 로봇을 얘기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 6’에 등장하는 ‘베이맥스(BayMax)’ 로봇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보았던 로봇들은 딱딱한 금속성 로봇이 대부분이었지만 베이맥스는 풍선처럼 몽실몽실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우리에게 한층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최근 미 유타 주에 위치한 브리검영 대학(Brigham Young University)의 '마크 킬팩(Marc Killpack)' 교수팀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자금 지원을 받아 베이맥스와 유사한 휴머노이드형 소프트 로봇 ‘킹 루이(King Louie)’를 개발했습니다.
l 미 브리검영 대학이 개발한 휴머노이드형 소프트 로봇 ‘킹 루이’ (출처: Brigham Young University)
이 로봇은 부드러운 패브릭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공기를 불어 넣어 부피를 늘릴 수 있습니다. 공기를 빼면 부피가 줄어들기 때문에 보관이나 이동시키는 게 용이합니다. 연구팀은 이 소프트 로봇 기술이 향후 협동 로봇이나 가정용 로봇 등에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소프트 로봇 기술의 도입 필요성이 높은 분야 중 하나는 의료용 로봇입니다.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는 수술용 로봇이나 내시경은 딱딱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고 직선적인 운동을 주로 합니다. 하지만 인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 기기가 몸 안에 들어가서 부드러운 성질의 인체와 만나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아직 의료 로봇에 소프트 로봇 기술이 본격 도입되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기술적인 발전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의료 로봇 업체인 ‘오리스 헬스(Auris Health)’는 수술 부위를 절개하지 않고 입 등을 통해 유연하게 움직이는 로봇을 몸으로 들여보내는 새로운 개념의 수술용 로봇 ‘아레스(ARES:Auris Robotic Endoscopy System)’를 개발해 FDA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의료 로봇 업체인 ‘메드로보틱스(Medrobotics)’가 개발한 플렉스 로보틱스 시스템(Flex Robotic System)는 로봇 팔이 뱀처럼 몸 안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직 수술용 로봇에 활용될 수 있을 정도로 검증된 소프트 로봇 기술이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의료용 로봇에 소프트 로봇 기술이 본격 채택된다면 수술 위험이 지금보다 줄어들고 인체에 미치는 충격도 작아질 것입니다.
l 목 안으로 유연하게 들어가는 수술용 로봇 ‘플렉스 로보틱스 시스템’ (출처: 메드로보틱스)
소프트 로봇 기술은 앞으로 의료용 로봇뿐 아니라 재활 로봇이나 근력증강 로봇 등 분야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이 착용하려면 아무래도 금속성 재질보다는 소프트한 재료가 훨씬 편안한 느낌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의 연구 기관들이 소프트 로봇 기술을 접목한 외골격 로봇 또는 웨어러블 로봇 개발에 나서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소프트 로봇 기술들을 속속 발표하고 있습니다. 코넬 대학은 감정 변화에 따라 피부 조직이 바뀌는 소프트 로봇 스킨을 제작했습니다. 마치 사람이 공포감을 느끼면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로봇 피부 표면에 돌기가 생기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소프트 로봇 스킨 기술을 활용하면 감정 변화에 따라 로봇 피부의 다양한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하버드 대학 연구팀은 호주에 사는 ‘공작 거미(Peacock Spider)’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몸의 형태, 동작, 색깔 등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소프트 로봇 거미(Soft Robot Spider)'를 제작했습니다. 미세 수술용 의료 로봇 등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탈리아 IIT(Istituto Italiano di Tecnologia) 연구진은 덩굴 식물처럼 다른 물체를 코일처럼 비꼬면서 올라가는 소프트 로봇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이 소프트 로봇 기술은 향후 웨어러블 기술이나 유연한 로봇 팔 기술에 적용 가능합니다.
l 하버드 대학은 소프트 회로를 구성해 물건을 잡는 소프트 로봇 기술을 개발했다. (출처: 하버드 대학)
하버드 대학 연구진은 소프트 로봇 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 회로를 개발했습니다. 기존에 개발된 소프트 로봇들은 주로 공기압 방식을 이용해 동작을 구현하고 있지만, 전기적 회로나 하드웨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버드 대학 연구진이 개발한 소프트 회로는 고무 밸브를 사용해 전기적인 회로와 유사한 로직 게이트를 구현했습니다. 공기압의 수준에 따라 디지털 신호처럼 1과 0으로 로직을 만들어 회로를 구성한 것인데요. 고무와 공기를 이용해 소프트 회로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전기적 회로나 하드웨어 없이도 완벽한 소프트 로봇을 구현할 수 있는 길도 머지않아 열릴 것입니다.
이처럼 소프트 로봇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비교적 복잡한 설계와 제작 방법 때문에 상용화가 쉽지 않다는 게 소프트 로봇의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퍼듀 대학 '램시즈 마티네즈 (Ramses Martinez)' 교수팀은 어떻게 하면 소프트 로봇을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이의 결과로 3D 프린터를 사용해 소프트 로봇을 빠르게 설계 및 제조할 수 있는 새로운 설계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 방법론은 사람 신체 등 바이오 모델을 바탕으로 소프트 로봇의 CAD 파일과 3D 구조의 소프트 머신을 만든 후에 3D 프린터로 소프트 로봇을 출력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사용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맞춰 소프트 로봇을 설계 및 제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초고령화 시대에 진입하면 노인들과 정서적인 교감뿐 아니라 물리적인 접촉 시 신체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소프트 로봇 기술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퍼듀 대학이 개발한 기술은 이 같은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l 퍼듀 대학이 개발한 소프트 로봇 개발 기법. 바이오 모델을 바탕으로 CAD와 소프트 머신을 만들어
소프트 로봇을 3D 프린팅한다. (출처: 퍼듀 대학)
이처럼 다양한 소프트 로봇 기술이 개발되고 있지만, 소프트 로봇 기술이 기존의 딱딱한 로봇 기술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스탠퍼드 대학 '지아다 게르보니’는 소프트 로봇이 전통적인 의미의 로봇보다 우위에 있다기보다 양쪽 기술이 결합해야 로봇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마치 인간의 몸이 부드러운 성질의 장기나 피부뿐 아니라 골격이나 관절처럼 딱딱한 구조물을 가진 것처럼 로보틱스 기술 역시 소프트한 부분과 딱딱한 부분이 결합해야만 구조적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프트 로봇이 유연성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정확도와 힘(Force) 측면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로봇에 비해 능력이 뒤떨어지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은 꽤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소프트 로봇에 대한 로봇 과학자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쓰임새도 확대될 것이란 점입니다. 일각에선 미래의 로봇에선 ‘금속’이 사라질 것이란 의견도 내놓고 있습니다. 소프트 로봇이 미래의 로봇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 l 장길수 l 로봇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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