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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의 발명 -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2016. 8. 2. 09:30

2015년 크리스마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은 현재 유럽 핵 연구 조직으로 알려져 있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 CERN)에 위치한 웹 서버에 웹 페이지가 최초로 게시된 지 25주년을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웹 없이는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구글과 페이스북, 이베이와 위키피디아에 이르는 다양한 응용 분야와 관련 산업 및 비영리 단체의 태동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월드 와이드 웹이 지니는 중요성은 실로 엄청납니다. 


후반기에 들어 독창적인 사상가와 진취적인 기업가 외에 멀티미디어, 컴퓨터 하드웨어, 코딩 분야의 수많은 혁신가들이 웹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웹의 시초는 소수의 인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컴퓨팅 연구원이자 프로그래머인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입니다.

 

l 최초의 웹 서버는 1990년 크리스마스에 가동되었습니다. C 언어로 작성된 이 서버의 소프트웨어는 NeXT 컴퓨터에서 실행되었으며, 컴퓨터의 케이스에는 손으로 쓴 글씨로 “이 기계는 서버입니다. 전원을 내리지 마세요!”라고 쓴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irst_Web_Server.jpg?uselang=en-gb)


따라서 월드 와이드 웹의 발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팀 버너스 리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1952년에 맨체스터에서 열린 페란티(Ferranti) 사의 크리스마스 파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는 매리 리 우즈(Mary Lee Woods) 여사가 참석한 최초의 중요한 사교적 모임이었습니다. 그녀는 호주 캔버라 시의 마운트 스트롬로 천문대(Mount Stromlo Observatory)에서 수학자이자 연구원으로 5년 동안 근무하고 1951년에 영국 전자제품 회사인 페란티 사에 입사하여 페란티 마크 I 컴퓨터의 개발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에서 그녀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페란티 사에 새로 입사한 수학자이자 엔지니어인 콘웨이 버너스 리(Conway Berners-Lee)를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1954년에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 해에 티모시 존 버너스 리(Timothy John Berners-Lee)를 낳았습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컴퓨팅 분야 연구에 바쳤던 팀 버너스 리의 부모는 어렸을 때부터 탐구심이 왕성했던 그의 호기심을 잘 받아주며 자극도 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나중에 수학 교사가 되었는데요. 수학이라는 학문에 매료되어 있던 이들 일가는 런던 남서부로 옮겨갔고, 식사 시간에 퍼즐 세트를 즐기며 수학이 매우 즐거울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철로 가까이에 있는 학교로 전학해 있는 동안, 버너스 리는 기차에 심취하여 철로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철로 모형에서 트랙과 기차를 전환하기 위한 컨트롤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는 전자제품을 만지작거리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흥미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옥스포드 대학 퀸스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는 동안 모토로라 6800 프로세서, TTL 게이트, 5파운드(미화 약 8달러)를 주고 구입한 구형 TV에 내장된 부품을 활용하여 그의 첫 번째 컴퓨터를 만들 정도였습니다. 수학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가졌지만,버너스 리는 그의 대학 전공으로 물리학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물리학이 수학과 전자공학의 중간에 위치하여 수학보다 더 실용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물리학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한 학문이었고 그로 인해 저는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후, 버너스 리는 돌셋(Dorset) 주의 풀(Poole)에 위치한 플렛세이 텔레커뮤니케이션스(Plessey Telecommunications Ltd.)에 입사하여 분산 트랜잭션 시스템, 메시지 중계, 바코드 기술을 연구하다가 1978년 D.G. Nash로 이직하여 지능형 조판 및 인쇄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년 후, 버너스 리는 소프트웨어 고문기사 자격으로 6개월 근무 계약을 맺고 CERN社에 입사했습니다. 얼마 안가 그는 이곳의 수많은 인력과 그들이 연구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CERN는 매우 다양한 컴퓨터와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고, 장치마다 공통점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서로 다른 프로그램과 운영 체제를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실험에서 얻은 데이터와 근거 자료 및 기술 문서들이 다양한 컴퓨터에 서로 다른 파일 형식으로 저장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특정 연구 분야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CERN의 다소 높은 이직률은 이러한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l “웹은 기술적인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창조물입니다. 제가 웹을 고안한 목적은 사회적인 효과를 위해서였습니다. 즉,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 기술적인 장난감을 만든 것이 아니었죠. 웹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에서 그물망과도 같이 얽혀 있는 우리의 삶을 돕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단체, 회사 등에 소속되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신뢰를 쌓고…” – 팀 버너스 리의 저서 'Weaving The Web'에서 발췌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im_Berners-Lee.jpg)

 
버너스 리는 방대한 수의 프로젝트와 인력, 연락처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고, 테드 넬슨(Ted Nelson),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등이 선도한 하이퍼텍스트 링크를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파스칼 언어로 작성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구축한 정보 시스템은 사람이나 프로젝트에 관한 특정 정보 단위와 다른 정보 단위와의 연관 관계를 데이터베이스에 '카드' 형식으로 저장하고, 링크를 통해 서로 다른 카드를 연결하여 다양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모든 집안 일에 대한 완벽한 안내서 역할을 하던 백과사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Enquire Within Upon Everything)'의 이름을 따서 이 소프트웨어를 '인콰이어(ENQUIRE)'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인콰이어는 아직 완전하지 못했고, CERN에서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버너스 리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이미지 컴퓨터 시스템즈(Image Computer Systems Ltd)에 입사하여 그래픽 소프트웨어와 실시간 제어 펌웨어에 관련된 업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1984년에 CERN으로부터 다시 제의를 받아, 이번에는 과학 데이터의 확보를 위한 분산형 실시간 시스템을 연구하고 CERN의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소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CERN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버너스 리는 이전의 인콰이어보다 더 활용 범위가 넓고 강력한 도구를 개발하는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그는 CERN의 상사인 마이크 센달(Mike Sendall)에게 정보 관리 시스템에 대한 제안서를 올렸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분산 가능하며, 운영 체제에 관계없이 CERN에서 사용하는 어느 컴퓨터에서나 실행 가능한 개방형 아키텍처가 적용된 공유 정보를 생성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버너스 리는 1998년에 기고한 'The World Wide Web: A very short personal history'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웹이 꿈꾸는 세계는 우리가 정보를 공유하여 소통하는 공동의 정보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이퍼링크 텍스트를 통해 개인적인 것이든, 지역적 혹은 전 세계적인 것이든, 잘 다듬어진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관계없이 어떤 정보로나 연결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춘 공간을 실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버너스 리의 제안에 대해 센달은 제안서 맨 윗 페이지에 “모호하지만 흥미롭군”이라고 휘갈겨 쓴 글씨로 답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버너스 리는 자신이 고안한 개념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0년 후반에 버너스 리는 초창기 월드 와이드 웹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개발해 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로버트 카이유(Robert Cailliau)와 대학원생인 니콜라 펠로우(Nicola Pellow)와 같은 동료들과 협력했습니다. 버너스 리는 카이유와 함께 CERN 휴게실에서 이 브라우저 프로그램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의논하다가 월드 와이드 웹이란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여러분은 '월드 와이드 웹' 대신 '정보의 보고(The Information Mine)' 또는 '정보 그물망(The Information Mesh)'이라고 명명된 공간에서 이 블로그를 읽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심각하게 고려되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습니다. 후자의 경우 'Mesh'라는 단어가 'Mess(엉망)'이라는 단어와 너무 유사하게 들렸고, 둘 다 버너스 리의 이름인 TIM을 약어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l 벨기에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로버트 카이유는 버너스 리의 동료였으며,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에 대한 제안서를 독자적으로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카이유와 니콜라 펠로우는 1992년에 최초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용 웹 브라우저인 MacWWW를 개발합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bert_Cailliau_On_Desk.jpg?uselang=en-gb)


브라우저 외에도 버너스 리는 1990년 가을과 겨울, 초기 월드 와이드 웹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더 개발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웹페이지를 게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이들을 표시하는 방법을 웹브라우저에 지시하는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각 정보마다 주소나 ID를 부여하여 검색이 가능하도록 하는 URL(초기에 Universal Resource Indicators로 불렸던 Universal Resource Locators의 약어), 서로 다른 통신 및 컴퓨터 시스템 간에 정보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규약 또는 규칙의 모음인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입니다. 


1990년 크리스마스 당시 비록 형태는 간단했지만 이러한 구성 요소들은 모두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카이유와 버너스 리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인터넷을 통한 웹 브라우저와 서버 간 통신에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다음 해에 그는 이 브라우저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반에게 알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달리, 월드 와이드 웹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버너스 리, 카이유, 그리고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CERN의 많은 직원과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에게 웹을 사용해 보도록 몇 개월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1993년 6월 당시만 해도 웹사이트는 전 세계를 통틀어 130개에 불과했지만, 버너스 리가 CERN을 설득하여 이 프로젝트의 소스 코드를 일반 라이선스 하에 배포하여 전 세계에 무료로 제공하도록 하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1994년에는 웹사이트가 2,400개를 넘어섰고, 10년 후인 2004년에는 5,160만 개로 추정되었습니다.


빠르게 증가하는 웹사이트 수만큼 월드 와이드 웹에 대한 상업적인 관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신생 프로그램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의 핵심 표준과 개방 원칙을 보호할 조직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1994년에 버너스 리는 CERN에서 나와 MIT 컴퓨터 과학 연구소로 옮겼고, 같은 해에 설립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 World Wide Web Consortium)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W3C는 웹의 미래를 논의하고 새로운 규약에 합의하는 중립적인 공개 포럼입니다.


팀 버너스 리가 처음부터 월드 와이드 웹을 상업화했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 개념이 성공을 거두려면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웹에 관한 버너스 리의 강한 개인적인 신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버너스리 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했던 때일 것입니다. 


그는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전 세계의 약 9억 명에 이르는 시청자들 앞에서 간단한 트윗을 전송했습니다. “This is for everyone(이것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l 팀 버너스 리의 트윗 “이것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 2012년 여름 올림픽 개막식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is_is_for_Everyone.jpg)


l 월드 와이드 웹의 아버지로서 버너스 리는 수많은 영예를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그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에 핀란드 헬싱키에서 최초로 밀레니엄 기술상(Millennium Technology Prize)을 받았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r_Tim_Berners-Lee.jpg)



['A Smart, Creative World: Past and Future' 연재 현황]


(1) 컴퓨터의 탄생, 시대를 앞서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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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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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NIAC: 세계 최초의 빠른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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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디버깅의 신화,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

http://blog.lgcns.com/1021


(5) 초기 컴퓨터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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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준 더글러스 엥겔바트

http://blog.lgcns.com/1060


(7) 웹의 발명: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http://blog.lgcns.com/1165


(8) 인터넷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1


(9) 위키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5


(10) 로봇의 발전

http://blog.lgcns.com/1182


글 ㅣ클라이브 기포드 (Clive Gifford) 




● 관련 자료

View Tim Berners-Lee’s initial path-finding proposal for a global hypertext system.

A short series of video interviews with Berners-Lee by the UK newspaper, The Guardian.

A short paper by Berners-Lee, entitled The World Wide Web: Past, Present and Future, giving insight into the initial Web’s architecture and operating principles.

Weaving The Web – Tim Berners-Lee & Mark Fischetti (collaborator) (Harper Business), 2000.

A personal, often fascinating,account of how Tim Berners-Lee and colleagues developed the World Wide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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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T로 만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갑니다 LG C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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