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크리스마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은 현재 유럽 핵 연구 조직으로 알려져 있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 CERN)에 위치한 웹 서버에 웹 페이지가 최초로 게시된 지 25주년을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웹 없이는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구글과 페이스북, 이베이와 위키피디아에 이르는 다양한 응용 분야와 관련 산업 및 비영리 단체의 태동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월드 와이드 웹이 지니는 중요성은 실로 엄청납니다.
후반기에 들어 독창적인 사상가와 진취적인 기업가 외에 멀티미디어, 컴퓨터 하드웨어, 코딩 분야의 수많은 혁신가들이 웹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웹의 시초는 소수의 인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컴퓨팅 연구원이자 프로그래머인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입니다.
l 최초의 웹 서버는 1990년 크리스마스에 가동되었습니다. C 언어로 작성된 이 서버의 소프트웨어는 NeXT 컴퓨터에서 실행되었으며, 컴퓨터의 케이스에는 손으로 쓴 글씨로 “이 기계는 서버입니다. 전원을 내리지 마세요!”라고 쓴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irst_Web_Server.jpg?uselang=en-gb)
l “웹은 기술적인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창조물입니다. 제가 웹을 고안한 목적은 사회적인 효과를 위해서였습니다. 즉,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 기술적인 장난감을 만든 것이 아니었죠. 웹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에서 그물망과도 같이 얽혀 있는 우리의 삶을 돕고 개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단체, 회사 등에 소속되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신뢰를 쌓고…” – 팀 버너스 리의 저서 'Weaving The Web'에서 발췌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im_Berners-Lee.jpg)
l 벨기에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로버트 카이유는 버너스 리의 동료였으며,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에 대한 제안서를 독자적으로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카이유와 니콜라 펠로우는 1992년에 최초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용 웹 브라우저인 MacWWW를 개발합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bert_Cailliau_On_Desk.jpg?uselang=en-gb)
브라우저 외에도 버너스 리는 1990년 가을과 겨울, 초기 월드 와이드 웹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더 개발해 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웹페이지를 게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이들을 표시하는 방법을 웹브라우저에 지시하는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각 정보마다 주소나 ID를 부여하여 검색이 가능하도록 하는 URL(초기에 Universal Resource Indicators로 불렸던 Universal Resource Locators의 약어), 서로 다른 통신 및 컴퓨터 시스템 간에 정보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규약 또는 규칙의 모음인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입니다.
1990년 크리스마스 당시 비록 형태는 간단했지만 이러한 구성 요소들은 모두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카이유와 버너스 리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인터넷을 통한 웹 브라우저와 서버 간 통신에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다음 해에 그는 이 브라우저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반에게 알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달리, 월드 와이드 웹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버너스 리, 카이유, 그리고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CERN의 많은 직원과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에게 웹을 사용해 보도록 몇 개월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1993년 6월 당시만 해도 웹사이트는 전 세계를 통틀어 130개에 불과했지만, 버너스 리가 CERN을 설득하여 이 프로젝트의 소스 코드를 일반 라이선스 하에 배포하여 전 세계에 무료로 제공하도록 하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1994년에는 웹사이트가 2,400개를 넘어섰고, 10년 후인 2004년에는 5,160만 개로 추정되었습니다.
빠르게 증가하는 웹사이트 수만큼 월드 와이드 웹에 대한 상업적인 관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신생 프로그램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의 핵심 표준과 개방 원칙을 보호할 조직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1994년에 버너스 리는 CERN에서 나와 MIT 컴퓨터 과학 연구소로 옮겼고, 같은 해에 설립된 월드 와이드 웹 컨소시엄(W3C, World Wide Web Consortium)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W3C는 웹의 미래를 논의하고 새로운 규약에 합의하는 중립적인 공개 포럼입니다.
팀 버너스 리가 처음부터 월드 와이드 웹을 상업화했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이 개념이 성공을 거두려면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웹에 관한 버너스 리의 강한 개인적인 신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버너스리 가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했던 때일 것입니다.
그는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전 세계의 약 9억 명에 이르는 시청자들 앞에서 간단한 트윗을 전송했습니다. “This is for everyone(이것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l 팀 버너스 리의 트윗 “이것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 2012년 여름 올림픽 개막식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is_is_for_Everyone.jpg)
l 월드 와이드 웹의 아버지로서 버너스 리는 수많은 영예를 얻었습니다. 예를 들어, 2004년에 그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에 핀란드 헬싱키에서 최초로 밀레니엄 기술상(Millennium Technology Prize)을 받았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ir_Tim_Berners-Lee.jpg)
['A Smart, Creative World: Past and Future' 연재 현황]
(1) 컴퓨터의 탄생, 시대를 앞서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2)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3) ENIAC: 세계 최초의 빠른 컴퓨터
(4) 디버깅의 신화,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
(5) 초기 컴퓨터의 진화
(6)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준 더글러스 엥겔바트
(7) 웹의 발명: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8) 인터넷의 탄생
(9) 위키의 탄생
(10) 로봇의 발전
글 ㅣ클라이브 기포드 (Clive Gif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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